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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의 이민짬밥> 시(10)월(月)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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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입니다. 그것도 1일입니다. 고열, 미열, 신열 할 것 없이 지난 여름의 열이란 열은 죄다 내린, 말갛고 보송한 얼굴로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더워 죽겠다 할 땐 언제고 아침 저녁으론 같은 입에서 춥단 소리가 나오니 이럴 때 잘 쓰는 상투적인 말, ‘인간이 참 간사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릴케의 시구처럼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시간 지났다고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위대는커녕 지난 여름은 치졸하고 옹졸했습니다. 지독하고 인색했습니다. 사람이 간사한 게 아니라 실은 여름이 너무한 거였습니다.

 

지난 여름을 떠올릴 때면 마치 고문에서 놓여난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엾은 영혼들의 그것처럼 지금도 고통스럽습니다. 호주 이민 21년 이래 여름철의 모국 방문은 처음인 데다 심란한 개인사까지 겹쳐 이중 짓눌림을 당한 저로서는 더욱이나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시름겨움이었습니다. 엄살이 아닙니다.

 

그러나 옛말 하고 살 때가 온다는 말은 계절에도 적용되나 봅니다. 그 지겹던 더위가 어느새 물러가고 이렇게 아깝도록 상쾌한 날을 맞고 있으니 말입니다. 꼭 거짓말 같습니다.

 

마치 사지(死地)를 뚫고 나온 전사(戰士)들마냥 연일 높고 푸른 초가을 하늘 아래 폭염을 이긴 자들의 승전보가 나부낍니다. 계절을 만끽하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가을 바람에 상큼하니 나부대는 젊은 여성들의 긴 머리는 청초합니다.

 

예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교환 학생으로 왔다는 두 인도네시아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영어로 말문을 여는 제가 오히려 무색하게 두 학생의 우리말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야기 끝에 둘은 합창을 하듯 한국은 사계절의 나라라서 남은 한국 생활이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일년 내 끈적이며 더운 자기네 나라에서야 이 정도 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고 한국 체류의 큰 의미는 사계를 골고루 즐기고 음미하는 것에 있다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나라, 한국’, 아마도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배웠나 봅니다.

 

그러나 저는 곧 자신 없고 시무룩해졌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그래, 한국의 멋지고 찬란한 사계를 기대해도 좋아. 일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라고 맞장구쳐 주질 못했습니다.

 

우울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가 사계절을 잃은 지는 실상 꽤 되지 않습니까. 시나브로 우리나라는 여름과 겨울만 있는 ‘두 계절의 나라’가 되어 짧아진 봄, 가을은 그저 두 극단을 잇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찰나에 머물 듯 애절함과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 곁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지만 여리고 순정한 누이동생, 헌헌장부, 후리후리한 이웃의 ‘훈남’을 잃는 허전함이 곧 밀려들 것이기에 말입니다.

 

떠날 것이 예고된 애인이라 해도 이렇게 감질나지는 않을진대 변심한 애인이라도 된다면 갈 때 가더라도 한번 매달려 볼 수는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계절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자'  운운할 일도 아닙니다. 계절이 우리를 속인 게 아니라 우리가 계절을 속인 것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봄과 가을을 질식시킨 공범입니다. 

 

마구, 함부로 먹고 쓰고 내뿜고 버리고 묻고 파내고 베어내고 뽑아내고 하는 사이에 지구가 병들고 자연이 제 방식으로 순환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우리 탓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여간 못살게 굴지 않았다는 뒤늦은 후회, 그러고도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비겁하게 외면했던 결과가 '봄 가을 실종'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범인은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더니 그래 놓고는 우리끼리 수군거립니다. “언제부턴가 봄, 가을이 없어졌어. 이제 곧 추워질 테지. 올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눈도 많이 오겠지? 걱정이네.” 더위가 꺾이던 9월 내내 몇 번이나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여름내 흘린 이맛전의 땀을 훔쳤건만 벌써 추워질 걱정으로 그나마 짧은 가을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할 모양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계절을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우리끼리는 서로 위무해야 할까요?       

 

지난 9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름에 만났던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자기네 나라에는 없는 계절, 한국의 가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을까, 10월은 또 어떤 마음으로 맞고 있을까, 그네들은 이 정도만 돼도 한국의 사계가 구분되어 느껴질까…

 

매서운 겨울이 조금이라도 더디 오기를, 이 가을이 조금이라도 더디 떠나기를 벌써부터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ayounshin@hotmail.com
2013-10-04 14: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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