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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억류' 호주선교사 어떻게 풀려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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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각오하고 '금식'하자 북한 관리들 걱정하며 태도 돌변

 

  지난달 16일 평양에서 '종교선전물' 배포 혐의로 체포, 15년형에 직면했던 호주인 존 쇼트(75) 선교사가 보름 만에 "기적"같이 전격 추방된 후 그의 활동기지인 홍콩에서 최근 인터뷰를 갖고 자초지종을 밝혔다. 다음은 그의 인터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쇼트 선교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친 사람 또는 공공장소에서 요란스럽게 성경 말씀을 전하거나 줄기차게 전도하는 복음주의적 "근본주의자"로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세 아들 중 적어도 하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불과 5주 전쯤 그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평양 공항의 젊은 입국심사관도 그랬다.

 

  쇼트는 "그가 '여기 웬 미친놈이 왔구만' 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성경을 갖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성경 없이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한 단호함이 상당한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일련의 상관들에게 물어본 후에 돌아와서 "내가 성경을 남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선교사는 그에게 "내가 왜 그렇게 하겠나. 그건 내 성경인데. 나는 그걸 매일 읽는다. 당신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쇼트는 성경 외에도 '내가 믿는 것이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전도용 소책자도 몇 부 갖고 있었다. 자신이 쓴 이 8쪽짜리 소책자는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그가 생각하는 성경의 핵심 복음 메시지를 추린 것이었다.


"성경 반입 안된다" VS "성경 없이는 안 들어가"

 

  쇼트의 계획은 2012년 그의 북한 방문 때 했던 것처럼 가급적 많은 유인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2년 전에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 들키지 않고 수백 장의 팜플렛을 놓고 내렸었다.

 

  그럼 왜 북한 같은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가 쇼트 같은 사람을 접대하려고 신경을 쓰는가? 현찰 때문이다.


  쇼트는 4일간의 방문에 대한 여행서류 비용으로 830불을 냈고 그의 일행 중 마지막 순간에 뒤로 빠진 소심한친구 4명에 대한 보상비용으로 500불을 부담했다. 어쩌면 그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의 유일한 동행은 15년 동안 그의 충실한 보디가드 노릇을 한 홍군(중국 인민해방군 전신) 출신의 데이빗 왕이었다.

 

  북한 여행에는 안내원이 따라붙게 돼 있다. 문제는 4일간의 "문화관광" 이틀째에 시작됐다. 북한은 그들의 종교적 관용을 과시하려는 열심으로 관광객들을 절간으로 데려갔다. 불행히도 누가 문을 부수고 들어간 모습과 함께 불상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안내원은 이곳에서 쇼트가 하려는 일을 눈치채고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아일랜드-독일계의 고집 센 강골이고 하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데이빗이 사람들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사이에 나는 언덕 옆으로 빠져나가 빈 방에 소책자 5부를 놓고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보았고 그들의 관광에 제공되었던 유엔차량 4륜구동차의 번호를 당국에 보고했다. 그날 밤 보안요원들이 그의 호텔을 찾아와 그가 한 일을 확인하고는 큰일났다고 말했다.


전도책자 번역자 이름 대고 자괴감 시달려

 

  30대 초반의 한 조사관이 전도용 소책자를 한글로 번역한 개인의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그가 한국인임이틀림없고 공모가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대면 호주인은 다음날 아침 출국할 수 있다고 약속했고 쇼트는 마지못해 그렇게 했다.

 

  번역자는 20년간 중국에 거주해온 한국 태생으로 이제 평생 동안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쇼트는 "자기 보호의 문제점"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배신자 유다 같은 극도의 자괴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조사관은 호텔 방을 떠날 때 돌아서더니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으나 그건 거짓이었다.

 

  다음 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무장한 남자들이 차를 세웠다. 왕에게는 여권을 돌려주면서 베이징으로 추방한다고 말했다. 쇼트는 억류된 채 그가 묵었던 관영 호텔 부속건물로 연행됐다. 그때부터 그는 경비원들이 6시간 교대로 감시했기 때문에 한시도 혼자 지낸 적이 없다.

 

  매일 오전과 오후에 그는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는 일어나서 머리를 숙이고 앉으라는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조사는 그의 친구관계와 대인관계 그리고 관련 단체에 대해 낱낱이 질문하고 추궁하는 지독한 것이었다.
     
  쇼트는 "거짓말은 하기 무섭게 들통이 나기 때문에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들은 너무 꼼꼼해서 모든 것을 점검하고 그들의 첩자들이 안 가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가 틀렸음을 입증하려고 심지어는 그의 홍콩 자택 겸 오피스에도 첩자들이 찾아가 사진을 찍고 서류를 빼돌리기도 했다.

 

  조사관은 그의 거짓말을 잡아내고 최고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음모를 입증하려고 집요하게 심문을 했으나 쇼트가 비정치적이고 초교파적인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되풀이하자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조사관이 '그건 논리적이 아니야' 라고 소리치면 '물론 비논리적이지. 그건 영적인 일이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도..할머니가 심어준 신앙 

 

  가장 어려운 것은 그의 인생 첫 24년 동안의 일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메우는 것이었다. 그가 1964년 가장 소중히 여기던 차를 포함해 세속적인 모든 물건을 팔고 홍콩으로 출항하기 전 호주에 살던 때의 일이었다.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고 누구하고 같이 있었느냐 등등 더 세밀하게 더 많이 체크할수록 "간첩"을 더욱더 잡아낼 가능성이 있었다.

 

  그의 나이로는 인생 첫 20년의 기억을 되살리기가 어려웠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의 어린 시절의 중대한 순간은 아버지가 새 엄마의 제안으로 두 아이를 "골칫거리"로 판정하고 고아원으로 보내바린 날이었다. 

 

  아버지가 호주군 공병부대원으로 참전했던 2차대전 직후의 일이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두 아이를 도로 데려올 때까지 형제는 누나를 보호자로 하여 스스로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입양아 출신이었고 그의 양어머니가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원시 감리교파 신자(1810년 잉글랜드에서 조직된 감리교 보수파)로 손자의 훗날 신앙적 열정에 씨를 뿌렸다.

 

  쇼트 선교사는 21세 때 남호주 로프티 산에서 열린 YMCA 캠프에서 "거듭남"의 은혜를 체험했고 중국인 복음전도자 겸 저자인 앤드류 기 박사의 설교를 듣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당시 그분은 우리에게 '여러분은 원하는 만큼 수시로 복음을 듣고 나서 애들레이드 교회에서 죽을 테지만 나의 동족 수백만 명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제2의 조국에서 살다가 죽겠다는 일념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50년 동안 마음이 따뜻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갔던' 것이고 나는 '보내진' 것이었다.그게 차이였다. 나는 한 순간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의심치 않았고 내 삶은 중국으로 인해 풍요로와질 뿐이었다." 

 

  그는 37세 때인 1976년 호주에 전도여행을 갔다가 퀸슬랜드주 지방의 한 주일학교 소풍에서 19세의 수습 간호사 카렌 러더포드 양을 만나고 18개월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프로포즈를 했다. 이들은 퀸슬랜드주 분다버그에서 결혼한 후 1주일 후 홍콩에서 살림을 차렸다.


케네스 배 비디오, 김선교사 기자회견도 시청

 

  북한 심문관들은 사흘 동안 그가 간첩이라는 이론을 강화시켰다. 간첩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한 일을 감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에 모욕적인 자료를 배포하는 등 불경스러울 뿐 아니라 위대한 김일성 부자의 동상에 참배하여 찬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끓는 차 주전자 때문에 손에 심한 화상을 입고 물집이 생긴 것이 좋은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노인으로서 동상에 참배하여 찬양하기엔 건강이 충분히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가 처한 곤경의 심각성이 충분히 와닿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당국은 쇼트와 비슷한 죄목으로 15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은 한국 태생의 미국인 여행사 대표 케네스 배 씨의 재판과 유죄판결을 담은 비디오를 시청케 했다. 한국 국정원의 첩자라고 자백한 김정욱 선교사의 기자회견 생중계도 지켜보았다.

 

  쇼트는 증거물로 진열된 김씨의 소지품 중에 자신의 성경 텍스트가 여러 개 있는 것을 보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다음 날 호통을 당할 줄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심문관에게 자기가 한국, 버마, 중국, 베트남어로 된 소책자를 수백만 부 인쇄했다고 밝히고 누가 그것들을 소지하고 있는지 추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일러주었다.


"당신들이 원하면 난 여기서 죽겠소"

 

  억류된 지 사흘이 지나자 심문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쇼트 선교사는 일이 신체적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있었다. 그는 물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했지만 노인은 신체적 위협에 특히 취약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또한 전도용 소책자의 번역자를 실토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그의 방대한 활동에 관한 비밀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를 공개하지 않으려 하면서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도 돼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들을 심사숙고하던 중에 그는 힘의 균형을 어떻게 가장 잘 바꿀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곤경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빼앗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억류 나흘째 되던 날 그는 식사를 중단했다. 금식은 그의 신앙 훈련의 일부이다. "첫 24시간은 위가 수축하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그 후에는 피가 머리로 쏠리며 생각이 명료해지고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단식투쟁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단지 "식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가 살고 싶은 의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게 그들을 겁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나의 자유를 통제하고 나의 정신까지 통제하려 하고 있지만 내 몸은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부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인을 보려면 건강하게 잘 지내도록 먹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 아내는 내가 사랑하는 줄 알고 있으니 내가 그걸 입증할 필요가 없다. 당신들은 이제 나의 목숨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 당신들이 내가 죽기를 원한다면, 난 여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그곳에서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쇼트 씨, 포기 말아요, 포기 말아요"

 

  열흘째 되던 날 머리카락이 없는 쇼트 선교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의 야심만만한 통역자는 그의 앞에서 먹으라고 호소하고 간청했다. "쇼트 씨, 심문은 길면 1년까지 지속될 수 있으니 힘이 필요합니다. 쇼트 씨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 북한의 힘이 무너졌다. 그는 베이징행 오전 항공편에 오르도록 짐을 싸는 데 1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이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는 북한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 충격이었다.

 

  두어 차례 충격은 더 이어졌다. 그의 심문관은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내가 선물한 몰스킨 노트북(일기장)을 갖고 싶어 했다. 매우 개인적인 처벌이었다. 기이하게도 한 페이지만은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죄, 자아, 그리고 사탄'에
관한 그의 글을 뜯어냈다.

 

  다음에는 그가 비자 기간을 초과해 "불법 체류한" 10일간의 "숙박비" 청구가 있었다. 그는 호주화 700불을 중국 위안화로 지불했고 베이징에 도착하면 미화 300불을 추가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현금을 소지할 수 있도록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안 되겠느냐고 요청했으나 "우리는 비자카드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중국으로 오는 2시간 동안 그는 비행기가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진을 빼며 괴로워했다. 그는 공항에서 입국신고를 하고 빠져나오면서 호주대사관 직원의 영접을 받았다.

 

reporter@hojuonline.net
2014-03-28 09: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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